짧지만 강렬한 저널리즘의 표상.
우크라이나 대기근 일명 홀로도모르(HOLODOMOR)를 세계 최초로 알린 가레스 존스의 치열한 삶.
가레스 존스는 러시아어를 포함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뛰어난 언어능력으로 영국의 전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외교 고문으로 발탁된다. 이후 스탈린 집권기의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면서 큰 성공으로 포장된 공업화 5개년 계획과 농업 집단화의 그늘을 목도한다. 성공의 이면에 가려진, 피폐해진 농촌과 굶어죽어가는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특히 우크라이나의 실상은 충격 자체였다. 그는 세상에 이 참상을 알린다.
저널리스트로 막 발을 뗀 젊은 나이에 이미 히틀러와 동석한 최초의 외국 언론인이었고, 레닌의 부인 크룹카타야를 비롯 카를 라데크, 막심 리트비노프 등 소련의 거물급 인사들을 인터뷰한 전도유망했던 존스의 삶은 서른에서 갑자기 멈춘다.
그의 피살을 둘러싼 의혹과 소련 비밀경찰 배후설은 바로 홀로도모르 보도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책은 언론 매체에 보도된 가레스 존스의 홀로도모르 기사, 1931년 및 33년 소련 방문 일지로 구성되었다.
지은이 가레스 존스(Gareth Richard Vaughan Jones, 1905~1935)
1905년 웨일스의 동남부의 글러모건(Glamorgan), 배리(Barry)에서 태어났다. 에버리스트위스(Aberystwyth, 웨일스 동부 도시)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에서 불어, 독일어, 러시아어 1등급 학위(first-class honours)를 받았다. 영어 포함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뛰어난 언어능력 덕분에 빠르게 외교 분야로 진출했다. 1929년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직후 잠시 모교에서 언어를 가르쳤고, 이듬해인 1930년 영국의 전 총리이자 의회의원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외교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여름 소비에트 연방과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를 처음 방문했다. 1931년 소비에트 연방을 두번째 방문했고, 이때 작성한 『1931년 소련 일지』는 1932년 익명으로 출간됐다. 1932년 가을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기아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자 가레스 존스는 다시 한 번 소련을 방문했다. 1930년 여름 3주, 1931년 여름 한 달에 이어 1933년 3월 가레스 존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연방과 우크라이나 방문을 시작했다. 이 무렵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를 비롯해 소련의 거물급 인사들과 면담하는 등 이미 저널리스트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직접 목격한 기아의 참상을 세계 최초로 1933년 6월까지 영국과 미국 언론을 통해 속속 기사로 타전했다. 스탈린의 치부를 드러내 비판했다고 여긴 소비에트 연방은 향후 존스의 입국을 영구 금지했고, 친 소련 서구 언론인들도 진실을 호도하며 그를 공격했다. 그러나 존스는 굴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여러 채널(특히 그를 공격했던 월터 듀란티와 관련된 조셉 퓰리처와 경쟁관계이자 영화 「시민 케인 」의 실제 모델이기도한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만나는 등)을 접촉하며 기아의 실상을 알리려고 고군분투했다.
이후 고향 배리로 돌아와 《웨스턴 메일》의 기자로 일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일본의 움직임에서 특이점을 감지한다. 일본 방문에 이어 다시 여러 나라를 거쳐 중국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독일 언론인 헤르베르트 뮬러(Herbert Muller)를 만나 함께 내몽고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도단에게 붙잡혀 뮬러는 풀려난 반면 존스는 살해되는 비운을 맞았다. 1905년 서른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의 석연찮은 죽음에 소련의 비밀경찰이 개입됐다는 의혹과 배후설이 계속되고 있다.
옮긴이 정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을 찾아서 읽으며, 가치 있는 무명작가와 작품을 재조명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 『해변에서』,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 『덩케르크』, 『위대한 쇼맨』, 『리지』, 『미드웨이:어느 조종사가 겪은 태평양 함대항공전』 등을 번역했다.